우리에게는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해당 개인/집단을 비난하려는 본능이 있다. 비난 본능은 왜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고 단순한 이유를 찾으려는 본능이다.
호텔에서 샤워를 할 때의 일이다. 온수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초 지나 뻘뻘 끓는 물이 쏟아져 살을 데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배관공에게 화가 치밀었다. 이어서 총책임자인 호텔 지배인, 찬물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 옆방 투숙객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누구도 내게 고의로 해를 끼치거나 태만하지 않았으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수도꼭지를 천천히 돌리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무언가 잘못되면 나쁜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가 그걸 원해서 그리되었다고 믿고 싶고, 개인에게 그런 힘과 행위 능력이 있다고 믿고 싶어 진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울 테니까.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재발을 방지하는 능력도 줄어든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지극히 단순한 해법에 갇히면 좀 더 복잡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고, 우리의 힘을 적절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항공기가 추락했을 때 졸고 있었던 기장만 탓하면 사고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장이 왜 졸았는지, 앞으로 졸지 않으려면 어떤 규제가 필요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기장을 추궁하느라 다른 생각을 못하면 발전은 없다.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출처
'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 올라 로슬링, 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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